(서머리 책요약) 현대 기독교 선교 - 존 스토트 (4)
2장 성서적 복음화
복음화의 우선권은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압박을 받거나 소홀한 취급을 받을 때 뼈아픈 양심의 고통과 연민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들이 거부받고 있는 것이 시민의 자유든, 인종적 존경이든, 교육이나 의료혜택 이나 고용이나 적절한 의식주 등 무엇이든 간에 그래야 마땅하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하는 것일진대 그 것이 여하한 것이든 우리에 대한 침해임을 알아야 하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 중에 복음에 대한 무 지와 거부로 야기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보다 더 심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해방이 영 원한 구원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진지하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양자가 공히 기독교적 사랑에 도전 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동족 유대인에 대한 관심에 대하여 엄숙하게 역설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나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 이라” 여기서 바울이 염원한 ‘구원’이란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이 문맥상 의심의 여지 없이 자명하다.
우리에게 만일 이런 내면적 고뇌가 거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미숙한 증표이다. 또한 스티픈 니일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선교문제는 에큐메니칼 운동 성패의 분기점이다.만일 에큐메니컬 운동이 우선적으로 세계복음화의 한 전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흥미로운 학문연구 운동에 불과하다. 복음화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복음화란 복음의 파급을 일컬음인데, 이 사실은 우리로 복음화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진술함으로써 소극적인 정의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첫째, 복음화란 복음의 수용자들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그것을 들을 필요가 있는 ‘비기독교인 들’을 충분히 수용자들로 생각하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선교’와 ‘복음화’를 구분할 때 선교는 복 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자들을 향한 것인 반면, 복음화는 기독교 국내의 사람들에 관계된 것이라고 제의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라면 복음을 들었든 안들었든 심지어 세례 를 받았든 안받았든 불문하고 모두 ‘복음화될’필요가 있다. 둘째, 복음화는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도 안된다. 신약성경의 용법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템플은 복음화를 갈리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 으로써 그들로 그리스도의 영생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비록 이런 것이 복음화의 제일가는 목적이긴 하지만 복음화는 사람들을 회심시키거나 그들을 획득하거나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다.
복음화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셋째, 복음화는 방법의 측면에서 정의되어서는 안된다. 복 음화란 선포방식이야 어떻든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 전달되는 수단에 관계없이 그것을 전달하는 그 자체이다. 교회가 복음적 열정을 크게 나타내리라고 우리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에 복음 을 애타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왜 그랬는가? 그는 복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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