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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11-32) 탕자의 명예로운 삶 (3)

by Peirasmos 201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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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11-32) 탕자의 명예로운 삶 (3)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와 시간을 주십니다.
아무리 잘 믿는 부모님이라고 해도 자식은 죄인을 낳습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잘 믿어도 자식이 예수님을 믿는 자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 인류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실수!
선택한 결과
하나님 없이 사는 자 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 생애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스스로 믿게 하시고 스스로를 불러 깨우치십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없이 살 던 생애와 구별되는 
하나님 자녀라는 이름으로 사는 명예와 영광을 요구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윤리와 유능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부모님이 있는 자와 부모님이 없는 자의 차이를 아십니까?
고아들은 울지 않습니다.
울어봐야 편들어 줄 부모가 없기 때문에 고아들은 울지 않습니다.
부모가 있으면
비록 가서 부모님에게 얻어 맞을 지언정 결국 사고를 쳐도 집으로만 가면 그 책임이 부모들에 의해서 어쨋든 해결이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쓸모있는가 하는 것은 유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예와 영광을 가지고 사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은 저와 여러 분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나의 부모님이라면 혼날 일이 있다고 해도 울면서 우선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자식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가지는 최고의 공포가 있다면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입니다.
쓸모있고, 확신을 가져서 흠없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싸움에서 지지 마십시오.
자식이 쓸모있고, 완벽해서 좋아하는 부모님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자식을 키우는 방향입니다.

매일 부모님이 얘가 별 쓸모가 없는데 더 살려둘 가치가 있을까?
얘가 기능이 좀 떨어졌는데 가족 구성원에서 뺄까? 밥 값도 못하는 것 같은데 밥을 좀 줄일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부모님은 없습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것은 오묘한 본능입니다. 부모님과 자식 사이에서 있는 말로 다 설명이 안되는 관계의 힘입니다.
이런 존재적인 힘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님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시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꼭 우리 부모님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 따위로 살아서 되겠어? 너 그런식으로 하면 난 더이상 너 도와줄 수 없어.
너 하려는 것 앞길이 뻔한데! 그것 하겠다고!? 그래? 그럼 나 더이상 몰라. 너가 알아서해. 너 나 원망하지마!
우리는 여기까지 밖에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보내줄 수 있으신 하나님.
포기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너 나중에 딴소리 하지마!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다 해먹어도 좋다.
가서 너 스스로 확인해 봐라! 하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렇게 삶을 돌아 돌아 돌아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때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꼭 찝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2가지를 고백합니다.
1. 아버지 저 왔습니다.
2. 많이 힘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나님께서도 2가지 말씀하십니다.
1. 이제 오냐
2. 애썼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잘못될 것을 아시지만 스스로 돌오기까지 기다리시고, 반드시 내 아들은 돌아온다는 확신을 가지신 아버지.
자기 잘난 맛에 평생을 탕진하고 기진맥진하여 면목없이 돌아오는 아들을 뜨겁게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 루미바이블은 널직한 시선으로 성경을 '이해' 해보려는 넉넉한 시도입니다 ::


본 글은 남포교회 박영선목사님의 설교문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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